영화 ‘남한산성’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의 이야기다.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숨는다. 청나라 군사들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철저하게 이들을 고립시킨다. 결국 인조는 한낱 오랑캐라며 무시한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의 숭덕제에 머리를 박고 항복한다. 삼전도의 치욕.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란 뜻의 ‘삼배구고두례’라고 칭해진다.

한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영화 ‘남한산성’은 쓸쓸한 풍경과 곤궁에 처한 민초들의 삶을 배경으로 오로지 말(言)로만 극을 이끌어가며 긴장감을 높인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은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은 청나라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고 반박한다.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명분과 삶의 대결 구도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길의 대의와 실리를 각각 말하며, 죽어야 할 방법을 제시한다. 최명길이 제시한 죽음의 길은 명분을 꺾고 살아있는 목숨을 살리는 것이었고, 김상헌이 제시한 죽음의 길은 명분을 살리고 목숨을 내주는 것이었다.

둘 다 죽음의 길을 말하고 있지만, 극단이다. 현란하고 주한하며 레일처럼 타협할 수 없는 말의 전쟁이다. 상대뿐 아니라 듣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여야 하기에, 자신을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에 인조의 말이 나오고, 용골대의 말이 섞이며, 조선에서의 노비의 치욕을 벗고 청의 역관이 되어 권력을 누리고 있는 정명수의 말까지 더해지면, 살(殺)이 되고 칼이 되는 세치 혀의 현란한 전쟁은 확장된다. 후손들은 이런 말의 확장과 부딪침을 모아 역사라 인식한다.

‘남한산성’ 속 최명길과 김상헌의 논쟁을 보다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속에서 말이다.

■ ‘삼국지’

정사 삼국지가 아닌 소설 삼국지는 원래 ‘삼국지연의’라 불리며 위, 촉, 오 3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를 나관중이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등과 함께 중국 4대 기서로 불린다.

삼국지는 “삼국지를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과 친구가 되지 말고, 세 번이상 읽은 사람과는 싸우지 말 것이며, 열 번이상 읽은 사람과는 상대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에서 의리와 배반, 이합집산하는 모습은 현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삼국지는 명장면이 수없이 많지만, 공명이 오나라를 찾아가 합심해 조조와 맞싸우자고 제안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훗날 벌어질 적벽대전의 불씨가 될 이 자리에서 공명은 장소를 비롯해 오나라들의 달변가들을 한명 한명 제압한다. 논리로, 이치로, 상식에 근거해 문관들을 기를 꺽어놓는다. 유비는 국가랄 것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였고, 오나라는 이미 번영하고 있는 국가였는데도 불구하고 대등하게 군사 협정을 맺고 조조와 맞선 것은 공명의 세치 혀가 만들었다. ‘남한산성’의 최명길?김상헌처럼 대의명분은 물론 실리를 따져 칼로 만들어 휘두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매일이 전쟁 같은 현대에는 사람들의 모든 말이 살(殺)이 되고 칼이 된다. 여기에 세치 혀뿐 아니라 손가락으로 그 역할이 확장됐다. 단지 과거처럼 대의나 명분, 실리는 없다.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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