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싶은 하루와 내가 살았던 하루는 정반대의 모습일 때가 많다. 인생에 대한 회의와 한숨과 탄식은 그 간극에서 나온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의 아침밥을 먹이고 유치원에 보낸 후 서둘러 출근해 미친 듯이, 쌓여가는 메시지를 볼 새도 없이 일하다 퇴근길에 올랐다. 퇴근길은 출근길 같았다. 회사는 퇴근하지만 집에서 아이를 위한 저녁을 지어 먹이고 씻기고 함께 책을 읽고 재워야 하고 아이가 잠든 후 회사에서 못다 한 일을 해야 할 판이었다. 회사는 배려하고 있다.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기에 출퇴근 시간은 다른 직원에 비해 앞당겨졌다. 그러나 제 몫은 해야 했기에 일은 줄어들 수가 없는 상황. 어쩔 수 없겠거니, 이것도 감사한 일이거니 하고 살았을 여느 때와 달리 그날은 솔직한 말로 남들보다 곱절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 괴발개발 기사를 쓴 어느 기자의 이름이 떠다니고 워킹맘 배려를 받고 있는 현실마저 짜증났다. 그 배려 탓에 나는 일하는 기계가 된 느낌이었다. 내 현실은 회사와 육아에 치여 쳇바퀴 안이 아닌 쳇바퀴 밖에서 계속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내가 살고 싶은 하루와 실제로 살았던 그 하루의 차이가 나를 숨막히게 하고 눈물나게 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 하루는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난 마음을 쓸어내렸다. 그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오늘 하루를 잘 보낸 내가 있기에 회사는 가치있는(적어도 내 생각엔) 콘텐츠를 실었고, 아이는 든든한 배로 유치원에 가고 따뜻한 집에서 뽀송뽀송한 몸으로 잠이 든다. 엉망진창인 집도 그나마 집 구실을 하는 정도가 되고 깨끗하게 비운 설거지통과 빨래통 덕에 우리 가족은 또 깨끗한 식기를 마음껏 꺼내쓰고 청결한 옷을 입는다. 이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지 않았더라면 불가했을 일이다. 그래서 지옥같았지만, 이 하루는 또 이토록 소중했고 가치 있었다고 조용히 나를 다독인다. 나 뿐일까. 하루를 무사히 잘 살아낸 모두가 그 밤, 어느 곳에서 지친 자신을 다독이고 있을 터다.
박노해 시인의 사진 에세이 ‘하루’는 감내하고 감사하며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조명하는 책이다. 박노해 시인은 세계 여러 나라들을 유랑하며 찍은 사진과 함께 자신이 느끼고 통감한 데서 써내려간 짧은 시를 곁들여 이 에세이집을 꾸렸다. 그는 우리의 하루를 두고 ‘평범하고도 경이롭고, 흔하고도 무섭다’라고 표현한다. 정확히 우리의 일상과 마음을 꿰뚫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매일 당연하다는 듯 주어지지만 사실 이 하루를 살아가지 못한 채 생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경이롭기 그지없다. 우리 삶에서 너무도 흔한 것이 이 하루지만 매번 주어진 날들이 줄어들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 하루를 이렇게 보내도 되는지 무서워지곤 한다.
사진=느린 걸음
박 시인은 다 안다는 듯 서문에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공감의 폭을 넓힌다. ‘노동의 새벽’의 얼굴없는 시인이었고 민주화운동을 했던 그는 7년 6개월 동안 독방에서 영어의 몸으로 살아야 했던 한을 풀기라도 할 것처럼 세계로 눈을 돌렸다. 그는 서문 ‘긴 하루의 생’에서부터 생의 한 순간이지만 생의 모든 것이기도 한 하루에서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하루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와 함께 박 시인은 티베트, 볼리비아, 파키스탄, 인디아, 페루, 에티오피아, 인도 등 전 세계 11개 나라에서 마주한 다양한 하루를 사진과 글로 담아낸다. 박 시인은 흑백필름 카메라, 당겨 찍는 줌기능조차 없는 수동카메라로 사람들의 가장 진하고 평범하면서 고귀한 삶의 순간을 포착했다. 그가 직접 촬영하고 한 장 한 장 암실에서 손으로 인화했다는 사진들에는 우리와 같지 않지만 우리와 똑같이 하루를 보내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모습들이 흑백으로 담겨 있다. 볼리비아의 한 광부는 지하 갱도에서 일하고 나서 마주한 햇볕에 눈부셔 하며 눈부신 지상의 시간과 만난다. 버마의 한 소녀는 아침마다 꽃을 꺾어 불전에 바치는 것으로 감사한 하루를 시작하고 인도네시아 농부들은 씨감자를 심으며 내일을 기약한다.
제각각 다르게 시작하고 다르게 살아가며 다르게 마무리하는 하루는 작고 평범하지만 박 시인의 눈과 마음을 거치며 고귀하고 장엄하게 비춰진다. 어쩌면 늘 빛나고 있었지만 알아보지 못했고 지나치고 말았던 삶의 순간들, 그 가치에 대해서 박 시인은 고요하고 차분하게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박 시인이 세계 곳곳에서 찍어온 사진으로 구성된 ‘하루’ 사진전은 서울 종로구 한 카페 갤러리에서 다양한 관람객과 만나고 있다. 사진전으로 봐도 묵직한 여운이 남겠지만 그의 글이 더해진 이 에세이집은 올 한해, 우리가 어떤 하루를 살아왔는지 다가오는 새로운 365일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박 시인의 “내가 나 자신의 하루를 살지 않는다면 무언가 내 하루를 앗아가고 만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며 내 안에 이미 있는 빛나는 길을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조언들을 듣고 있노라면 깊게 와 닿는다. 우리가 흘려보내는 이 하루들 속에 진정 나를 찾아가는 순간이 있다면 우리의 행복은 더욱 진한 색채로 반짝일 테니.
우리의 삶, 그보다 작은 파이의 하루를 되새겨볼 수 있도록 이 에세이집 표지에 실린, 마치 선물같은 박노해 시인의 문구를 함께 전한다.
“이 삶의 무게에 사랑이 있고 희망이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감내할 힘이 생겨나느니
나는 하루하루 살아왔다
감동하고 감사하고 감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