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문학과지성사
‘이퀼리브리엄’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감정의 실체와 색채를 모른 채 살아가야 한다. 결국 주인공이 감정을 느끼는 세상을 되찾는다는 결말로 끝나는데 만약 현실이 이런 세상이라면 숨어 살면서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인간의 감성을 지켜내고 퍼뜨리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이병률 작가가 아닐까 싶다. 이병률 작가는 특유의 감성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를 글에 담아내면서 서걱대는 현대인의 마음을 자극한다. 그의 작품이 출간되면 꼭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며 책을 읽기 버거워하는 이들이라도 소장하고 싶어하는 책의 작가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래서 그를 두고 혹자는 젊은 세대의 감성 멘토라 부르기도 한다. 이같은 이병률 작가의 감수성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밤과 혼자 있는 시간, 작가로서의 숙명이 현대 시대의 독보적인 감수성을 만들었다. 이병률 작가는 28일 네이버 ‘작가의 본심’을 통해 좀 더 솔직한 작가로서의 이병률을 드러냈고, 수줍은 듯 감성적인 언어들로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혼자가 체질이라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속살을 내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혼자를 사랑하고, 혼자라는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며, 혼자이기에 작가로서의 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사람, 바로 이병률이다.
사진=계간 발견
■ “밤, 내가 살아가야 하는 방식을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
“내가 작가가 되기 전 사랑했던 매체는 라디오였어요. 그때 라디오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떻게 살아갈까 이런 궁금증이 높았죠. 같은 맥락에서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도 있을 거예요. 나는 벽이 버티고 서 있는 구석진 자리의 의자에 앉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내 성격이 이상하구나’ 생각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공간안에 있는 사물을 한꺼번에 보겠다는 의지의 일환이라고도 생각해요. 특히 내가 생각하는 작가란 하염없이 생각 속을 걷는 사람, 쓸거리 앞에서 끝없이 서성이는 사람이에요. 만약 작가가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생중계된다면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언젠가 누우라는 동물을 관찰하는 관리인이 누우가 전속력으로 달리다 갑자기 멈춘다며 무척 웃긴 장면이라고 했어요. 아마 작가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누우를 보는 관리인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요”
누가 어떻게 보든 작가는 열심히 써나가고 있다는 것이 이병률 작가의 설명이다. 오롯이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작가이기에 이병률 작가는 밤을 사랑하기도 한다. 그는 ‘혼자가 혼자에게’에서도 밤의 의미를 밝힌 바 있다.
“오늘밤도 시간이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말을 건다. 오늘밤도 성장을 하겠냐고. 아니면 그저 그냥 지나가겠냐고.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보통의 사람은 남이 만든 파도에 몸을 싣지만 특별한 사람은 내가 만든 파도에 다른 많은 사람을 태운다”(-'혼자가 혼자에게' 中)
이병률 작가에게 있어 밤의 의미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밤에 깨어있는 이에겐 스스로를 되돌아볼 시간과 성장할 기회가 생긴다고 말한다. 밤을 사랑하는 그는 심지어 “밤이 없으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해요”라면서 “밤은 내가 살아가야 하는 방식을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이에요. 밤에 깨어 있어야만 하는 사람은 결국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자주 해보곤 합니다”라고 밤 애찬론을 펼쳤다.
이병률 작가는 자신의 에세이마다 직접 찍은 사진을 수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글만큼 사진으로도 사람들에게 감성을 전하는 그는 이날도 사진으로 작가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두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하얀 설원 속에 홀로 서 있는 사진으로 생각의 길을 하염없이 헤매는 작가의 고충을 설명한 그는 어린아이가 비눗방울을 만드는 사진으로 작가 역시 결과물을 알 수 없는 이라고 묘사했다. 어린아이가 비눗방울로 어떤 모양을 만들고 싶다고 해도 비눗방울을 만드는 그 순간 어떤 모양과 크기의 방울이 만들어질지, 몇 개의 방울이 탄생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작가 역시 독자에게 자신의 글이 어떻게 가 닿을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비눗방울을 만드는 아이와 작가 자신을 비교하며 그는 “그런 면에서 작가란 직업은 신비하다. 좋지 않게 말하면 참담하기도 하다”고 오직 독자에 의해 평가되는 작가의 숙명을 논했다. 더불어 그가 생각하는 작가는 외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사진=네이버 VLIVE
■ 말과 행동보다 쉬웠던 글쓰기
“작가라는 사람은 무엇으로 이뤄졌고, 무엇 때문에 사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작가는 사실은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닐까요. 혼자서 잘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요? 사실 세상에는 협업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내놓는 일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그러나 작가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혼자서, 가능한 길게 책상에 앉아 있을수록 성과가 좋아질 수밖에 없는 일이 작가지요. 그런 면에서 작가라는 직업은 나와 잘 맞아요. 내가 작가라는 어려운 직업을 선택한 건 누구랑 이야기하고 회의하는 것보다 혼자 시작해서 결말을 맺는 작업형태가 잘 맞았기 때문이에요. 나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고, 말하는 것보다 행동을 통해 생각을 전하는 것보다 몇 글자를 통해 마음을 전하는 게 더 쉬웠던 사람이라서요”
또 그는 남의 인생을 빌려 재활용하기도 하고 연기자가 됐다가 연출자가 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고도 했다. 남의 인생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작가가 되기 힘들고 그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일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또 작품을 써가면서 1인 다역을 하는 배우처럼 이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기도 하고 저 캐릭터에 빙의해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작가가 하는 일은 혼자서지만 그 영역만큼은 결코 좁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작가로 명성을 얻고 독자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작가는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이병률 작가는 말한다. 그는 “외롭고 고독해서 작품을 쓰면 괜찮겠지만 그 안에 함몰된다면 요즘말로 폭망일 수밖에 없어요”라면서도 “혼자있는 시간이 쌓이고 쌓여 우리를 단단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리움, 인간의 고유한 온도를 떠올리게 만들죠”라고 외로움이 사람과 작가를 성장시킨다고 말한다.
‘혼자가 혼자에게’를 쓴 이유가 이해가 될 법도 하다. 실제로 그는 혼자인 자신을 잘 경영하자는 의미에서 이번 신간을 내놨다고 밝힌다. 그 자신 역시 그런다고. 이병률 작가는 “혼자 사는 건 힘들죠. 그래서 또 하나의 이병률이 있다고 생각하고 주문을 걸고 사는 겁니다”라면서 “내가 조금 괜찮은 사람이니까 조금 부실한 이병률과 여행을 떠나죠. 내가 조금 옹졸한 사람이라서 좀 더 건강한 정신상태의 내가 내 뒤통수를 때려주는 겁니다. 그런 의미예요. 또 하나의 나를 데리고 영차영차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일까요”라고 신간을 기획하게 된 취지를 설명했다.
사진=출판사 달
■ 혼자인 게 너무 좋은 남자
혼자인 상황을 너무도 사랑하고 아끼는, 때로는 즐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지점에서 드는 의문. 그런데 그는 정말 혼자인 것이 좋을까? 이에 대해 이병률 작가는 “난 혼자가 좋습니다. 혼자가 편해요. 물론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도 좋았고 소중했어요. 그리워하고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더 많은 부분과 순간들에서 나를 자극하는 것은 혼자일 때입니다”라면서 “가뿐하다는 생각도 들고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묻지 않아도 되고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좋아요. 주변 사람들조차 ‘혼자인 걸 너무 좋아해서 어떡하니’라고 말할 정도입니다”라고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밝혔다. 그렇다면 그가 결혼할 확률도 낮아지는 셈이다. 실제로 이병률 작가는 세간이 인식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크게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결혼이라면 할 수도 있겠어요. 나는 여기 살고 배우자는 제주도쯤 사는 거죠. 둘이 만나려면 노력해야 하고, 만약 그게 귀찮으면 만나지 않아도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그런 관계요. 사랑이라는 중요한 무언가에 결속될 수 있다면 결혼을 할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면 아무래도…예를 들어볼까요. 결혼한 내가 여행을 간다고 하면 배우자가 그럴 거예요. ‘또?’라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겠죠. ‘작가인데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하고’라고 한다면 ‘놀고 있네’ 같은 식의 말을 할 수도 있겠어요. 성격상 나는 상처 제조기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이런 결혼이라면 여러 생각을 할테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겠죠. 혼자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외롭게 하는 것 같아요”
혼자가 좋은 이유는 또 있다. 그가 결혼생활을 가정하며 언급한 여행이다. 그의 책들에서도 이병률 작가라는 사람이 여행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무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실제의 그는 책으로 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행을 사랑한다. 여행 중독을 넘어 여행이 생활화된 느낌이랄까.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작가는 여권이 없었으면 좋겠다”면서 여권 없이도 각국을 다닐 수 있는 유엔 사무국 직원들이 부러울 정도란다. 심지어 여권이 있어야만 한다면 입국 수속 절차라도 면제받았으면 한다고. 이같은 간절한 바람은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는 희망으로 이어진다. 이병률 작가는 “여권이 없다는 말은 속하는 곳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겠다는 말도 되겠죠. 나는 투명인간이 되고 싶어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투명인간이 돼서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에 내려 투명인간 모드를 해제하고 돌아다니고 싶어서예요”라고 이룰 수 없는 소망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러면서 “왜 여행을 다니고 싶어하고 여권이나 투명인간에 대해 꿈을 꾸는가 하면 작가에 중요한 것이 세계관이라서”라고 작가의 본심을 드러냈다.
사진=이병률 작가 트위터
■ 작가로서 성공했다고 느낄 때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 여행은 언제가 될까. 그 스스로 정할 수 있다면 그때는 언제일까. 이병률 작가는 아마도 자신의 생에 마지막 여행이라는 의미조차 없을 것이라면서 “내게 마지막 여행은 거부하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3~4년 전인가, 마지막 여행을 떠올려보긴 했어요. 조금 무서웠던 게 더 이상 가고 싶은 데가 없다는 것이었거든요. 또 여행을 더 다니지 말라는 신호인가 싶은 순간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계속 다니고 있어요. 더욱이 육체적으로 힘든 여행일수록 빨리 해버리고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히말라야를 다녀왔는데 또 가고 싶어요. 내게 있어 마지막 여행이라는 말은 거부할 테지만 이제는 좀 길게 다니는 여행을 꿈꾸긴 해요. 3~4년씩 다니는 여행요. 그렇게 있다 한 3개월 정도 한국에 머물고 다시 떠나는 형식이요. 여행이지만 머무는 형태의 여행을 꿈꾸고 있고 다양한 나라의 언어도 배우고 싶어요”
이병률 작가는 16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 국어선생님이 그의 이름 끝자를 음율 율자로 생각하고 “시인이 되라고 이름을 지어줬구나”라고 말한 것이 그의 운명을 정했다. 이후 그는 꾸준히 시를 썼고,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지 10년째에 시인이라는 직업을 세상이 인정해줬다. 그리고는 20~30대를 온통 라디오 작가로 살기도 했다. 그리고는 고독한 감성을 세상에 흩뿌리며 두터운 독자층을 얻었다. 얽매이는 걸 싫어하지만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이렇듯 숙명적이었고 다양했던 그의 삶을 자서전으로 엮는다면, 이병률 작가는 어떤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까. 이에 대해 그는 잠시간 고민하다 “내가 먹은 술의 양은 얼마나 될까”를 첫문장으로 선택할 것이라 말했다. 그는 “신체가 받아들이니까 먹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좋아하니까 술을 먹는다는 생각도 하는데요. 혼자 먹지 않고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얘기를 들으려고 해서 그들을 편하게 해주려 내가 술을 마시나 하고 합리화도 하지만 어쨌든 많이 마십니다. 다행인 건 술에 의존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내가 마신 술의 양을 이야기하면서 술값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겠죠. ‘술값은 내가 다 냈나?’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할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자서전마저도 어쩐지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며, 밤에 읽을 때 감성이 배가 되도록 쓸 것만 같은 그다. 그러나 이에 앞서 그는 더 많은 작품과 시로 독자를 찾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여행이 계속되는 한, 혼자로서의 시간이 지속되는 한 그는 꾸준히 우리의 감성을 터치하고 심장을 건드릴 것이다. 물론 그가 바라는 것은 심장과 뇌가 이어지는 순간이다. 이건 그가 가진 작가로서의 욕망이자 최대의 희열이기도 하다. 독자가 이런 순간을 느끼는 한, 그는 계속해서 글을 써내려갈 것임을 쉽게 예감할 수 있었다.
“작가는 뭔가를 숨기는 존재예요. 문장 속, 이야기 속에 무언가를 배치하죠. 만약 작가로서 너무 난해한 것을 숨긴다면 그건 작가로서의 자격이 안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반대로 숨기긴 잘 숨겼는데 꼬리가 너무 길어 다 드러나는 은유라면 좋은 문장이 될 수 없겠죠. 그래서 작가는 잘 숨기는 게 중요한데 독자들이 이를 알아차렸을 때, 그는 뇌와 심장에 연결된 아주 가는 관에서 미세한 전류가 통하는 걸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럴 때 작가의 본심은 ‘음, 성공했군’이지 않을까요(웃음)”